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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역사 인물] 탐라를 정벌하다, 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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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
정보화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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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안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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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7.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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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5692
[탐라를 정벌하다, 최영]
해양수산부가 선정한 '이달의 해양역사 인물'
오늘은 지난 4월 선정된 해양역사 인물로
해양군사 전문가 '최영'의 이야기를 만나보겠습니다.
이달의 해양역사 인물 09 탐라를 정벌하다 최영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이 명언은 고려 말 최고의 정치가이자 무적의 지휘관이었던 최영의 아버지가 16살, 어린 그에게 남긴 유훈이다.
모든 권력자들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배를 불릴 때에도 최영은 청렴함을 잃지 않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지도자가 된다.
그의 명성은 전란 속에서 더욱 다져졌는데 1359년, 홍건적의 침입에 개경이 함락당한 위기상황에서 개경 수복 작전에 큰 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그의 나이가 이미 60이 넘은 1376년, 출정을 자처해 입술에 화살을 맞은 상태에서도 적을 압도한 <홍산대첩>은 고려 말 대표적인 왜구토벌의 승첩으로 꼽힌다.
그 어떤 전투에도 두려움을 모르는 담대한 기질의 최영은 해양 군사 전문가이기도 했는데 이를 뒷받침 해주는 전투가 바로 탐라(지금의 제주) 정벌이다.
당시의 탐라는 삼별초가 원나라에 패망한 이후 약 100년 간 원나라 직영 목마장을 관리하는 몽골인 목호들에게 지배 당하고 있었다.
원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목호들의 반발이 계속되자 고려 조정은 최영을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한 진압군을 탐라에 파견한다.
1374년, 병사 2만 5605명과 전함 314척을 거느리고 명월포(한림옹포리)에 상륙한 최영은 치열한 전투 끝에 목호군 수뇌부를 제압한다.
고려에서 몽롤 세력을 뿌리 뽑아 제주도의 주권을 회복시킨 업적에는 최영이 해양 군사 전문가로서의 역량이 빛을 발휘했다.
이후, 요동정벌을 위해 팔도도통사로 임명된 최영은 끝까지 고려를 지키고자 하였지만, 반대파였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체포되어 참수되고 만다.
최영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청렴한 인품을 존경했던 개경 사람들은 그가 죽던 날, 시장을 모두 닫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바다에서 길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합니다.
해양수산부, 한국해양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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